

























질문이 바뀐 사람들
(눅 10 : 29-37)
한규성 목사
(예수비봉교회 담임)
대화는 정확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해야 좋은 대화가 이뤄지고,
정확한 질문은 우리를 문제 해결로 이끌어 간다.
본문에서는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선 대답 대신 반문을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질문 자체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험하여 이르되’라고 하였다.
율법 교사였으므로 예수님이 정통한 메시야인지 시험해보고, 유대인에게 알려줘야 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자기중심적이었다. 질문의 포커스가 ‘나’였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코자 질문했고 자기 확정성의 틀 안에서 자기 말만 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방법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들었고 자기 이야기만 했다.
예수님을 인정했다면, 받아들이기로 결단했다면, 놀랍고 영광스러운 만남이 되었을 텐데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율법 교사는 자기 옳음의 확신 속에서 율법을 해석해주는 지식인으로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이다.
복음의 온전한 이해는 우리의 질문을 바꾼다.
자기중심적 질문에서 예수 중심, 공동체 중심 질문으로 바꾼다.
율법 교사는 옳게 보이려고 냉소적으로 의기양양하게 또 질문한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판단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율법이 가진 참 정신에 눈뜨게 하시려고
이야기를 해주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이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한 제사장이 피하여 갔고,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보았고, 주막 주인에게 2 데나리온도 주며 부탁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율법 교사, 제사장, 레위인의 자리에 있게 될 때가 많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우려다가 율법을 어기게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혹시 강도 만난 자가 이미 시체이면 부정한 것을 만지는 게 된다.
그런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우리도 강도 만난 사람이었다.
그때에 선한 사마리아인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주막 주인에게 2 데나리온을 주시고 잘 돌봐 달라고 요청하셨다.
죄와 사망으로 강도 만난 자들을 입히시고 돌보시고 회복시키셨는데 그 중에 우리도 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에서 2 데나리온을 가진 사마리아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질문을 바꾸는 것이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가 이웃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하신다.
이웃은 우리에게 불편한 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낼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선 또 하나의 주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2 데나리온을 소유한 또 하나의 사마리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역에서 하나님 사랑을 옮겨 드리는
또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길 소망한다.
글 정영희B 집사
사진 한윤미 집사